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릉 정기전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연고전]]/[[고연전]]처럼 처음에는 농상전/상농전으로 불리었었다. 1920년대 [[강릉시]] 축구가 [[강릉 단오제]]에 편승되어 질적·양적인 축구열기 속에서 '관동 단양제 축구대회'가 시작이다. 원래는 강릉을 비롯한 사천, 연곡, 주문진 등 지역대항 시합이었으나, 1925년에는 대관령을 넘어서 [[춘천시]], [[평창군]], [[양양군]], [[고성군(강원도)|고성]], 장전[* 지금의 [[강원도(북한)|북한 강원도]] [[고성군(북한)|고성군]]], '''[[함흥군]]''', '''[[포항시]]''', '''[[울산광역시]]'''에서도 참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. 1935년에 강릉공립농업학교가, 1941년에는 강릉공립상업고등학교가 축구부를 창단하면서 '관동 단양제 축구대회'에서 두 학교가 늘 맞부딪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라이벌로 자리매김했다. 지금은 폐교된 주문진수산공업고등학교(주문진 수고)[* 현재는 학교 부지에 [[강원도립대학]]이 위치해 있다.]도 함께 참여하여 삼파전 양상을 띄곤 했지만, 1976년 강원도축구협회 주최로 첫 정기전을 치르게 됐다. 이후 강릉상고의 이름이 강릉제일고로 바뀌면서 일농전/농일전으로 불리다가 강릉농고가 강릉중앙고로 바뀌자 강릉 정기전으로 불리고 있다. 아래는 이 더비매치의 '''위엄(?)'''을 보여주는 사례. >"...두 학교의 숙명적인 축구 전쟁은 194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. 1935년 강릉농공고가 축구부를 만들자 6년 뒤 강릉상고 역시 축구팀을 조직하면서부터다. 전국대회 지역예선이나 강원도 지역대회에 참가해 맞붙곤 했지만 처음부터 두 학교의 축구시합이 투석전을 동반하는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. > >61년 노암 공설운동장이 설립돼 축구가 강릉의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으면서 두 학교 간 대결 양상도 차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. 경기 후 승부에 불만을 품은 재학생과 동문들의 투석전도 빈번해졌다. 60년대 강릉농공고를 졸업생 말에 의하면 "그땐 수업 빼먹고 돌 주우러 가기 바빴지. 시합 끝나면 정해진 순서처럼 투석전으로 이어졌으니까"라고 당시를 기억했다. > >그래도 강릉 시민 전체가 두 학교 간 축구 시합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자 강릉시 축구협회가 나서 두 학교 축구 시합을 아예 정기전으로 할 것을 주선했다. 두 학교의 합의로 76년 협회 주관하에 단오제 시기에 맞춰 '강릉 농.상 정기전'이 시작됐고, 78년부터는 봄.가을로 대회를 개최했다. 그러나 문제는 갈수록 심해지는 두 학교 간의 앙숙 관계였다. > >마침내 82년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. 당시 6월 25일 춘계대회가 끝난 뒤 패배한 강릉농공고 학생들이 분풀이로 강릉상고로 진입하여 학교를 엉망으로 만들고 교문을 떼어 강릉 남대천에 버리자 이에 질세라 강릉상고 학생들이 강릉농공고로 쳐들어 간 것. 경찰이 사태 진압에 나섰으나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양측 학생들이 벌인 치열한 싸움은 며칠 동안 강릉시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한다. 결국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농.상전은 이후 6년간이나 중단되고 말았다. > >89년 재개된 상.농전은 2년 만에 경비 과다 부담을 이유로 다시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다 94년 두 학교 동창회 주관으로 부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." [[http://blog.naver.com/pkm00511015/70021744063|참조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